‘양심’이 사라진 시대, 당신의 ‘공정함’은 안녕하신가요?
혹시 ‘양심’이라는 단어를 마지막으로 써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시나요?
어색한 질문이라는 거 압니다. 마치 “요즘 유행하는 상투가 뭐요?”라고 묻는 것처럼 시대착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잠시만 시간을 내어 이 질문에 답을 찾아보세요. 아마 대부분은 한참을 망설이게 될 겁니다. 이상한 일이죠.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 아버지들은 “이 양심 없는 놈!”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는데 말입니다.
언어는 생각의 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단어를 자주 쓴다는 건, 그 단어가 가리키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반대는 어떨까요? ‘양심’이라는 단어가 우리 곁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그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는 비상 신호는 아닐까요?
오늘 저는 이 ‘사라지는 단어, 양심’이라는 현상을 실마리 삼아, 우리 모두가 목 놓아 외치지만 실은 아무도 제대로 모르는 ‘공정’의 진짜 조건을 파헤쳐 보려 합니다. 아마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당신이 믿었던 공정함의 세계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똑같이 받았는데, 왜 불행할까? ‘공평’과 ‘공정’의 함정 😵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죠.
키가 제각각 다른 세 사람이 야구장 담벼락 너머로 경기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똑같은 높이의 발판 상자를 하나씩 나눠주는 것. 우리는 보통 이걸 ‘공평(Fairness)’하다고 말합니다. ‘1인 1상자’, 얼마나 명쾌한가요.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요? 키가 가장 큰 사람은 상자 없이도 경기를 볼 수 있었고, 중간 키의 사람은 상자 덕분에 경기를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키가 가장 작은 사람은 상자를 딛고 서도 여전히 담벼락에 가려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받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소외되는 이 상황. 과연 이것을 정의롭다 말할 수 있을까요?
이때, 가장 키 큰 사람이 말합니다. “나는 상자가 필요 없으니, 키 작은 분에게 내 것을 드리겠습니다.” 키가 작은 사람은 두 개의 상자를 딛고 서서 마침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경기를 즐기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공정(Justice)’입니다. 2023년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한 노교수가 던져 깊은 울림을 주었던 이 비유는, 우리가 놓치고 있던 진실을 꿰뚫습니다. 공정은 기계적인 균등 분배가 아니라, 각자의 처지를 헤아려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담긴 행위라는 것을요.
그리고 이 위대한 전환을 만들어내는 힘, 그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조금 손해 보더라도, 그것이 옳다고 믿기에 기꺼이 내어주는 마음. 이것이 바로 사라지는 단어 양심과 공정의 조건 사이의 사라진 연결고리입니다.
“요즘은 그게 ‘쪽팔린’ 거야” : 양심의 자리를 대체한 것들 씁쓸..
언어학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단어가 사라지는 이유를 두 가지로 봅니다. 용도가 폐기되었거나, 다른 단어로 대체되었거나. 놀랍게도 ‘양심’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대체어는 소름 돋을 만큼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바로 ‘쪽팔림’입니다.
“양심에 찔려서”가 아니라 “들키면 쪽팔려서” 우리는 법을 지킵니다. “양심적으로 살아야지”가 아니라 “남 보기에 쪽팔리지 않게 살아야지”라고 다짐합니다. 내면의 목소리였던 양심은, 이제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비난이라는 외부의 감시자로 대체되었습니다. 행동의 동기가 ‘옳고 그름’이라는 내적 기준이 아니라 ‘들키면 창피하다’는 외적 기준으로 옮겨간 것이죠.
이는 단순히 단어 몇 개의 변화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도덕적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Decline of Moral Vocabula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1).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이 끊임없이 경고했듯, 가치 판단을 배제한 채 ‘중립’을 가장한 자유나 ‘결과의 평등’만을 외치는 사회는 결국 공동체의 미덕을 잃고 각자의 이익만을 좇는 싸움터로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라지는 단어 양심과 공정의 조건이라는 화두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상자를 나눠주고 결과적 불평등은 ‘네 탓’이라며 외면하는 ‘공평한’ 사회인가요? 아니면 내가 가진 상자를 기꺼이 내어주며 함께 웃을 수 있는 ‘공정한’ 사회인가요?
진정한 공정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 📝
그렇다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거창한 구호는 잠시 접어둡시다. 진정한 공정은 아주 사소한 생각의 전환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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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권리’가 누군가의 ‘기회’를 막고 있지 않은지 질문하기
야구장 비유 속 키 큰 사람은 발판 상자를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권리가 키 작은 사람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혹시 누군가의 출발선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는 것. ‘양심’이라는 내면의 레이더를 다시 켜는 첫 단계입니다. -
2.
‘결과’가 아닌 ‘과정’의 정당성을 이야기하기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결과의 공평함에만 집착해왔습니다. 시험 점수, 연봉, 아파트 평수처럼 숫자로 딱 떨어지는 결과 말이죠. 하지만 진정한 공정은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정당했는지를 따져 묻는 데 있습니다. 똑같이 노력했는데 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는가? 투명한 과정과 절차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사라지는 단어 양심과 공정의 조건을 되살리는 길입니다. -
3.
‘양심’을 다시 입에 올리는 용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고도 간단한 해결책입니다. 바로 ‘양심’이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건 좀 양심에 찔리는데?” “우리 양심적으로 한 번만 더 생각해보자.” 어색하고 낯간지럽더라도, 이 단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며 우리 생각의 서랍에서 꺼내놓아야 합니다. 죽어가는 단어에 숨을 불어넣는 것은 결국 그 말을 쓰는 우리 자신이니까요.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당신이 꿈꾸는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요? 모두가 똑같은 상자를 하나씩 나눠 가진 채, 담벼락 너머를 보지 못하는 이웃을 외면하는 삭막한 세상인가요? 아니면 나의 상자를 딛고 올라 환하게 웃는 이웃의 모습에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인가요?
그 답은, 오늘 당신이 잠들기 전 ‘양심’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떠올려 보는지에 달려있을지 모릅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
Q. ‘공평’과 ‘공정’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요?
👉 ‘공평(Fairness)’은 모두에게 똑같은 기회나 자원을 나눠주는 '형식적 평등'에 가깝습니다. 반면 ‘공정(Justice)’은 각자의 다른 상황과 조건을 고려하여 실질적인 평등을 이루려는 노력입니다. 야구장 비유처럼, 키가 작은 사람에게 발판 상자를 더 주는 행위가 바로 공정이며, 여기에는 ‘양심’이라는 도덕적 판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Q. ‘양심’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게 왜 중요한 문제인가요?
👉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이라는 단어의 소멸은 우리 사회가 행동의 기준으로 ‘내면의 옳고 그름’보다 ‘외부의 시선이나 처벌’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사라지는 단어 양심과 공정의 조건이 무너지고 있다는 위험 신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Q. 진정한 공정을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 거창한 행동보다, 일상 속 작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내가 마땅히 누릴 권리가 혹시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하는 것,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의 정당성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 그리고 ‘양심’이라는 단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다시 사용하는 용기만으로도 우리는 더 공정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