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과의 약속, 지켜야 할까?
(부제: 당신의 삶을 붙잡는 약속의 진짜 의미)
혹시, 누군가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무언가를 맹세해 본 적 있으신가요? 어릴 적 친구와의 유치한 비밀 약속부터, 연인과의 영원을 다짐했던 순간까지. 우리의 삶은 보이지 않는 약속들로 촘촘히 엮여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약속이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발이 묶여 당신의 현재를 붙잡고 있다면 어떨까요? 더 나아가, 약속의 상대방이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기 제나(Jenna)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10년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아내 이본(Yvonne)과 두 가지를 약속했습니다. 하나는 둘이 함께 일군 난치병 치료 연구 재단을 계속 지원할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절대 재혼하지 않을 것.
10년이 흐른 지금, 난치병은 정복 직전이고 제나에겐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죽은 아내와의 약속이 그녀의 발목을 무겁게 붙잡습니다. 여러분이 제나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 이처럼 딜레마의 한복판에 서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약속’의 진짜 얼굴과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 껄끄럽고도 중요한 ‘약속’이라는 녀석의 정체를 파헤쳐 보려 합니다. 단순히 ‘지켜야 한다’는 1차원적인 구호를 넘어, 철학과 심리학, 그리고 역사의 현미경으로 그 속살을 깊숙이 들여다볼 겁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신다면, 당신의 삶을 지탱하거나 혹은 옥죄고 있는 그 약속들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될 거라 약속합니다.
🤔 착각 1: "약속은 무조건 신성하다?"… 글쎄요
우리는 흔히 약속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둡니다. 약속을 어기는 것은 곧 배신이고, 신뢰를 저버리는 비윤리적 행위라고 배우죠. 하지만 정말 모든 약속이 동등한 무게를 가질까요?
철학자들은 약속이 성립되는 ‘조건’에 대해 아주 까다로운 질문을 던집니다(참고: 약속의 윤리적 측면). 만약 누군가 당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전 재산을 내놓겠다고 약속해!”라고 한다면, 그 약속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강요나 기만 아래 맺어진 약속은 윤리적 효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나의 경우를 다시 보죠. 죽어가는 아내의 마지막 부탁. 이건 물리적 강요는 아니지만, 거절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감정적 강요’ 상태는 아니었을까요? 이처럼 약속의 ‘내용’만큼이나 그것이 맺어진 ‘상황과 과정’이 중요합니다. 모든 약속이 신성하다는 건, 어쩌면 우리가 만든 편리한 착각일지 모릅니다.
🏛️ 약속은 왜 우리를 지배하는가: 철학자들의 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약속에 집착하는 걸까요? 그저 개인 간의 신뢰 문제일까요? 철학자들의 생각은 좀 더 거대합니다.
1. 사회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둥 (흄 & 롤스)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아주 재미있는 주장을 합니다. 약속은 원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인간이 ‘인위적으로 발명한 것’이라고 말이죠. 마치 화폐처럼, 그 자체로는 종잇조각에 불과하지만 모두가 그 가치를 믿기로 ‘약속’했기에 경제가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약속은 사회라는 거대한 건물을 지탱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멘트인 셈입니다(출처: The School of Life). 존 롤스(John Rawls) 역시 약속을 ‘공정성’의 문제로 보며, 우리가 약속이라는 제도를 통해 이익을 얻었다면, 그 규칙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약속을 깨는 것은, 혼자만 무임승차하려는 것과 같다는 거죠.
2. 의무의 왕, 칸트의 일침
여기서 ‘융통성 제로’의 끝판왕,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등장합니다. 칸트에게 약속은 ‘만약(if)’이 붙을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만약 내가 약속을 지키면 이익이 된다면…” 같은 조건문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죠(참고: 칸트 윤리학과 약속). 칸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내가 필요할 땐 언제든 거짓 약속을 해도 괜찮다’는 규칙이 보편화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도 약속을 믿지 않게 되고, 결국 ‘약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붕괴할 겁니다. 따라서 약속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결과가 오든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습니다. 제나가 칸트에게 상담을 요청했다면, 아마 “네, 다음 질문.”이라는 대답만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3. 약속하는 인간, 초인의 탄생 (니체)
반면, 망치를 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약속을 조명합니다. 그에게 약속이란, 단순히 의무를 넘어선 ‘힘의 표현’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약속을 한다는 것은 변덕스러운 미래의 나를, 현재의 내가 통제하겠다는 의지입니다. “나는 내일의 내가 변심하거나 잊어버리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라고 선언하는 것이죠. 니체는 이렇게 자신의 미래를 통제하고 책임질 수 있는 존재, 즉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을 길러내는 것이 인류 역사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과업을 완수한 존재가 바로 ‘초인(Übermensch)’입니다(참고: 니체의 약속에 대한 관점).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제나가 약속을 지키는 행위는 단순히 이본과의 의리를 지키는 것을 넘어, 10년이라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온 ‘주권적 인간’으로서의 자부심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 과거의 약속과 악수하는 법: 새로운 대안
자, 이제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셨을 겁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고요. 여기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과거의 약속이 현재의 당신을 옭아맬 때, 우리는 어떻게 그 딜레마를 풀어갈 수 있을까요?
저는 세 가지 단계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 1단계: 약속의 ‘유통기한’ 확인하기
모든 약속에는 암묵적인 ‘맥락’과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제나의 경우, ‘난치병 치료 연구’라는 공동의 목표가 약속의 중요한 배경이었죠. 하지만 그 목표가 거의 달성된 지금, 약속의 전제 조건 중 하나가 바뀐 셈입니다. 약속이 맺어졌던 그 순간의 맥락이 지금도 유효한지, 혹시 약속의 유통기한이 다한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2단계: ‘문자’가 아닌 ‘정신’을 계승하기
죽은 아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제나가 평생 외롭게 사는 것, 그 자체였을까요? 아니면 자신들의 사랑이 ‘영원히 기억되고 존중받는 것’이었을까요? 때로는 약속의 글자 하나하나(The Letter)에 얽매이기보다, 그 약속에 담긴 본질적인 정신(The Spirit)을 계승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제나가 새로운 사람과 행복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이본과의 사랑과 추억을 소중히 기리고 그들의 재단을 통해 사회에 기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약속의 정신을 더 높은 차원에서 지키는 길이 아닐까요? - 3단계: 나 자신과의 새로운 약속
궁극적으로, 우리는 과거의 누군가에게 한 약속만큼이나, 현재와 미래의 나 자신에 대한 약속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과거의 약속을 존중하되, 그것이 나의 성장을 가로막고 행복을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나와 화해하고, 현재의 나를 보살피며, 더 나은 미래의 나를 만들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무리하며: 당신의 삶을 붙잡는 그 약속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오늘 ‘약속’이라는 익숙한 단어 뒤에 숨겨진 복잡한 철학적 지도를 함께 여행했습니다. 약속은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기도, 스스로의 의지를 증명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제나의 딜레마에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는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잃게 될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약속의 노예가 되어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스스로 해석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약속은, 어쩌면 어제의 내가 아닌 더 나은 내일의 나를 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잊지 못할 약속이 있나요? 혹은, 당신의 삶을 붙잡고 있는 오래된 약속이 있나요? 댓글을 통해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자주 묻는 질문 (FAQ)
Q1. 오래전 친구와 한 사소한 약속, 기억나지 않는 척해도 될까요?
A1. 약속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친구와의 관계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만약 사소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 가벼운 사과와 함께 현재의 관계에 더 집중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칸트가 아닌 이상, 모든 약속을 기억하고 지킬 수는 없으니까요.
Q2. 비즈니스에서 약속(계약)의 중요성은 왜 이렇게 강조되나요?
A2. 흄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 세계는 거대한 신뢰 네트워크입니다. 계약이라는 형태의 약속은 이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핵심 장치죠. 계약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돈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신뢰 자본을 쌓는 행위이기에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Q3. '선의의 거짓말'로 한 약속도 지켜야 하나요?
A3.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선의’라는 의도와 ‘거짓말’이라는 행위가 충돌하기 때문이죠. 철학적으로 보면, 약속의 기반이 된 정보가 거짓이었으므로 약속의 효력 자체가 의심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새로운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