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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바로의 마음을 굳게 하셨을까? ⚖️
혹시 이런 사람을 본 적 있나요?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고도 사과 대신 변명을 늘어놓고, 모두가 “그건 아니지”라고 말하는 길을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사람. 우리는 처음엔 안타까운 마음으로 설득하고, 다음엔 화를 내며 붙잡아보고, 마지막엔 지쳐서 등을 돌리며 중얼거립니다. “저 사람은 그냥 저렇게 살게 내버려 둬야 해. 스스로 선택한 거잖아.”
바로 이 서늘한 체념의 순간, 우리는 출애굽기의 가장 불편한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바로의 완악한 마음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출 4:21). 이 구절은 순진한 믿음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마음을 굳게 만드셨다면, 바로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이것은 전능한 신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벌인 불공정한 게임은 아니었을까? 오늘, 우리는 이 껄끄러운 질문의 정곡을 찌르며,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진실을 탐사하려 합니다.
오해의 시작점: 정말 불공정한 게임이었나? 🤔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바로의 자유의지를 빼앗았다"는 생각은 출애굽기를 표면적으로만 읽었을 때의 가장 흔한 오해입니다. 성경의 내러티브는 훨씬 더 정교하고, 심리학적으로도 소름 돋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스릴러처럼, 사건의 순서와 단어 선택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7장에서 10장까지 이어지는 첫 번째 재앙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운 패턴이 발견됩니다. 처음 다섯 번의 재앙 동안 성경은 한 번도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또는 “바로가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라고 일관되게 서술합니다. 동사의 주체가 명백히 '바로 자신'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헬스장에서 근육을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완악함’이라는 근육을 단련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모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거절’이라는 벤치 프레스를 들어 올렸고, 그의 마음은 스스로 단단해지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굳어지는 3단계: 바로의 선택, 그리고 하나님의 인준 💧🧱
성경 기자들은 두 가지 다른 히브리어를 사용하며 바로의 상태를 입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단어들을 추적하면, 마음이 돌처럼 굳어가는 비극적인 3단계 프로세스가 보입니다.
1단계: 무거워진 마음 (카베드, כָּבֵד)
초반 재앙에서 사용된 단어는 ‘무겁다, 둔감하다’는 의미의 ‘카베드’입니다. 바로는 모세의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재앙이 닥치면 잠시 뉘우치는 척하다가 이내 마음이 다시 무겁고 둔감해져 약속을 어깁니다. 이것은 그의 ‘선택’의 영역이었습니다. 회개의 기회는 계속 주어졌지만, 그는 스스로 그 기회를 걷어찼습니다.
2단계: 스스로 강화된 마음 (하자크, חָזַק)
이야기가 중반으로 넘어가면 ‘스스로 강하게 하다, 붙잡다’는 의미의 ‘하자크’가 등장합니다. 이제 그는 단순히 둔감한 수준을 넘어, 자신의 완고한 결정을 적극적으로 고수하기 시작합니다. 신하들이 “이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을 아직 알지 못하시나이까”라고 절규해도 소용없습니다. (출 10:7) 그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젖은 시멘트가 서서히 굳어버리듯, 그의 마음은 변화가 불가능한 상태로 굳어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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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하나님에 의해 굳어진 마음 (하나님의 ‘하자크’)
바로 이 지점,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돌이킬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된 바로 그 순간부터 비로소 성경은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라고 서술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없던 악을 주입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벽하게 악의 길을 선택하고 스스로를 그 길에 묶어버린 바로의 선택을 ‘인준(Ratification)’하고 ‘강화’시켜, 그를 당신의 더 큰 구원 계획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네가 그토록 완고함의 왕이 되기를 선택했느냐? 좋다. 이제 그 완고함을 사용하여, 내가 진정한 왕임을 온 세상에 보여주겠다.” 바로의 완악한 마음과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최악의 선택조차도 결국엔 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심판의 목적: 파괴가 아닌 구속을 위한 설계도 🗺️
결국 열 번째 재앙, 유월절의 밤이 찾아옵니다. 이 밤의 심판은 바로가 행한 악의 거울상입니다. 그가 히브리인의 장자를 죽였듯, 이집트의 모든 장자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라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피를 바른 집은 심판이 ‘넘어갔고(Pass-over)’, 그 안의 생명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본질입니다. 심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왜 구원이 필요한지를 처절하게 드러내고 그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완악한 마음과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는 우리에게 엄중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 삶에 반복되는 경고와 회개할 기회 앞에서, 나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카베드’와 ‘하자크’의 길을 걷고 있는가. 바로의 비극은 신의 불공정함이 아닌, 회개의 기회를 끝까지 거부한 한 인간의 선택이 빚어낸 필연적인 파국이었던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결국 바로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었던 것 아닌가요?
A1. 👉 아닙니다. 출애굽기는 바로가 처음부터 스스로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카베드), 강하게 했다고(하자크) 명확히 기록합니다. 수많은 재앙 앞에서 그는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은, 그가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의 선택을 확정하고 더 큰 목적을 위해 사용하신 것입니다.
Q2.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다는 구절을 오늘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A2. 👉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죄짓도록 조종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계속해서 교만과 불순종의 길을 선택할 때,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택을 그대로 ‘허용’하시고 그 결과에 내맡기시는 상태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반복되는 “내버려 두사”라는 표현과 비슷한 맥락으로, 스스로 선택한 길의 끝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Q3. 왜 하나님은 바로를 그냥 즉시 멸하지 않고 열 번의 재앙을 내리셨나요?
A3. 👉 열 번의 재앙은 단순히 벌을 내리는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각 재앙은 나일의 신, 개구리 신 등 이집트의 신들을 하나씩 격파하며 ‘누가 진짜 신인가’를 보여주는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또한, 이 과정은 바로에게 열 번의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며, 동시에 노예 생활에 찌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똑똑히 보여주어 그들의 믿음을 세우는 교육 과정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