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장점을 10가지만 말해보세요"
면접이나 자기소개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 없으신가요? 처음 서너 가지는 술술 나오지만, 다섯 개를 넘어가면서부터 머릿속이 하얘지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분명 나에게는 더 많은 장점이 있을 텐데, 왜 그것들을 떠올리는 과정은 이토록 힘겹게 느껴질까요?
더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이 힘겨운 과정을 겪고 나면, 우리는 이상하게도 스스로를 '장점이 별로 없는 사람'처럼 느끼게 됩니다. 상식적으로는 장점을 많이 떠올릴수록 자신감이 높아져야 하는데도 말이죠. 이 기묘하고도 보편적인 경험의 비밀은, 독일의 심리학자 노르베르트 슈바르츠(Norbert Schwarz)가 밝혀낸 '인출 용이성(ease of retrieval)'이라는 놀라운 심리 현상에 숨어있습니다.
가장 똑똑한 착각: 양보다 질, 내용보다 느낌
슈바르츠와 그의 동료들은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들의 자기 평가는 '얼마나 많은 사례를 떠올렸는가(양)'와 '사례를 얼마나 쉽게 떠올렸는가(느낌)' 중 무엇에 더 큰 영향을 받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그들은 아주 독창적인 실험을 설계했습니다.
심리학 실험: 당신의 자신감을 재는 법
연구팀은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서로 다른 과제를 주었습니다.
- A그룹: 당신이 자신감 있게 행동했던 사례 6가지를 적어주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과제)
- B그룹: 당신이 자신감 있게 행동했던 사례 12가지를 적어주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겨워하는 과제)
과제가 끝난 후, 두 그룹 모두에게 "당신은 스스로 얼마나 자신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12가지나 되는 사례를 떠올린 B그룹이 스스로를 더 자신감 넘치는 사람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결과는 상식을 완벽하게 뒤엎었습니다
놀랍게도, 자신감 있는 행동을 12가지나 떠올린 B그룹이, 고작 6가지를 떠올린 A그룹보다 스스로를 '덜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평가했습니다.
이 역설적인 결과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양'과 '느낌'의 싸움에서 '느낌'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B그룹 사람들은 12가지 사례를 채우기 위해 낑낑대며 머리를 쥐어짰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뇌는 이 '힘들었던 경험' 자체를 강력한 신호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나 떠올리기 힘든 걸 보니, 나는 별로 자신감 있는 사람이 아닌가 보군.' 이라고 말이죠.
착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연구팀은 실험을 한 번 더 비틀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참가자들에게 '소심하게 행동했던' 사례를 12가지 떠올리라고 요청했습니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과제를 매우 어려워했죠.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들은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꽤 자신감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들의 뇌는 이렇게 추론한 것입니다. "내가 소심했던 기억이 이렇게나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나는 전혀 소심한 사람이 아니구나." 기억을 인출하는 과정의 '어려움'이,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은 당신의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소름 돋는 진실을 알려줍니다. 우리의 자기 인식, 신념, 심지어 특정 제품에 대한 선호도까지도, 우리가 가진 증거의 '양'이 아니라 그 증거를 '꺼내는 느낌'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택에 대해 더 많은 근거를 대라고 요구받을수록 그 선택에 대한 확신이 떨어지고, 어떤 차의 장점을 많이 나열할수록 그 차가 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현상도 모두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니 다음에 스스로에 대해, 혹은 세상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잠시 멈춰 서서 질문해보세요. "이 생각은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그것을 떠올리는 과정이 너무 쉬웠거나, 혹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 질문 하나가, 당신을 뇌의 가장 정교한 착각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