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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완벽했던 7일간의 침묵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 온몸이 악성 종기로 뒤덮인 욥. 그의 비참한 소식을 들은 세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 그리고 소발이 먼 길을 달려와 그를 찾아옵니다.
그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처참해진 욥의 모습을 보고 함께 소리 내 울며, 겉옷을 찢고 재를 머리에 뿌리며 그의 고통에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밤낮 7일 동안, 아무 말 없이 그저 욥의 곁을 지켰습니다. (욥기 2장 11-13절). 여기까지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위로의 모습이었습니다.
문제는, 욥이 침묵을 깨고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고통을 토해내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합니다.
위로가 정죄로 바뀌는 순간
친구들은 고통스러워하는 욥을 보며, 자신들이 가진 '세상의 법칙'을 꺼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과응보(Retribution)', 즉 '모든 고통은 죄의 대가'라는 단순하고도 강력한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들의 위로는 순식간에 '신학적 심문'으로 변질됩니다.
친구들의 논리: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첫 번째 친구 엘리바스가 먼저 입을 엽니다. 그의 논리는 경험에 근거합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 욥기 4장 7-8절
두 번째 친구 빌닷은 전통과 역사를 근거로 욥을 압박합니다. "네 자녀들이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은 것이다. 너라도 어서 회개하라." 세 번째 친구 소발은 한술 더 떠 욥을 '악인'으로 규정하며, "네가 받는 벌은 네 죄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라고 몰아붙입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네 고통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너의 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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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지혜였을 것을!"
친구들의 집요한 정죄 앞에서 욥은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결백을 항변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봐도 도무지 벌 받을 만한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의 '상식적인' 세계관으로는 자신의 고통이 도저히 설명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욥은 폭발합니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잠잠하기만 하였다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였을 것이니라!"
욥에게 친구들의 위로는 더 이상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고통을 섣불리 재단하고 판단하는 폭력이자,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가장 잔인한 말이었습니다. 그는 차라리 신에게 직접 이 부당함을 따져 묻겠다고 선언합니다(욥기 13장 4절).
우리는 왜 욥의 친구들처럼 위로에 실패할까?
욥의 세 친구 이야기는 단순히 오래된 종교 서적이 주는 교훈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인간관계 속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고통받는 이에게 너무나 쉽게 '조언자'나 '판단자'가 되려고 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설명'이 아닌 '함께 있음'이다
욥의 친구들이 실패한 이유는 그들의 관심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지나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욥의 고통에 함께 머무르기보다, 그것을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설명'하고 '해결'해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 놓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명쾌한 해답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그 답 없는 질문의 무게를 함께 져 줄 사람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처음 7일간 보여주었던 그 침묵의 '함께 있음(presence)'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위로였던 것입니다.
혹시 지금 당신의 곁에 이유 없는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이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섣부른 조언과 분석을 거두고, 그저 7일간의 침묵으로 그의 곁을 지켜주었던 욥의 친구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위로'를 피하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