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우리는 살면서 종종 멘탈이 무너지는 순간을 마주합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죠.
첫째는 나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입니다. 사업에 실패했거나, 관계에서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었을 때처럼 말이죠. 원인이 명확하기에 자책과 후회로 밤을 지새우지만, 그럼에도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진짜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는 것은 두 번째 경우입니다.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때.
성실하게 살아왔고,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은 적 없는데 갑자기 찾아온 불행.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거지?"라는 질문은 머릿속을 맴돌지만, 세상은 끝내 답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바로 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무너뜨립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남자, 욥의 이야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수천 년 전, ‘이유 없는 고난’의 대명사가 된 한 남자의 이야기를 꺼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욥(Job)입니다.
욥은 당대 최고의 부자이자 존경받는 의인이었고, 슬하에 열 명의 자녀를 둔 행복한 가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천상에서 벌어진 신과 사탄의 대화 하나로 그의 삶은 송두리째 파괴됩니다.
"욥이 까닭 없이 신을 경외하겠습니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보십시오. 틀림없이 당신 앞에서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
– 사탄
이 대화 직후,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하인, 그리고 열 명의 자녀까지 모두 잃게 됩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 그는 옷을 찢고 머리를 밀었지만 놀라운 말을 내뱉습니다.
"주신 분도 신이시요, 거두신 분도 신이시니…"
그는 신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탄의 시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욥의 온몸에 끔찍한 피부병이 생겨, 그는 잿더미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어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그의 아내조차 "신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할 정도였죠.
최악의 위로: "네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봐"
욥의 비극적인 소식을 들은 세 명의 친구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들의 위로는 오히려 욥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당시 사람들은 '모든 고통은 죄의 결과'라는 인과응보적 세계관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욥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숨겨진 죄를 집요하게 추궁하기 시작합니다.
- 친구: "분명히 네가 신께 잘못한 게 있으니 이런 벌을 받는 거야. 어서 회개해."
- 욥: "아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것이 없다."
이 끝없는 논쟁 속에서 욥은 철저히 고립됩니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 괴로운 것은, 자신의 결백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사실과, 이 고통의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답답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섣부른 판단을 할까?
이는 단순히 욥의 친구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그때 네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다 너 잘되라고 겪는 일이야" 와 같은 섣부른 조언을 건네곤 합니다. 이는 고통을 '이해 가능한 범주' 안에 두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방어기제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신의 대답
결국 욥은 신을 향해 직접 부르짖습니다. "제발 제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라도 알려주십시오!"
오랜 침묵 끝에, 마침내 신이 폭풍우 속에서 나타나 욥에게 말을 건넵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욥이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신은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도리어 욥에게 이해할 수 없는 질문들을 쏟아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 바닷물이 태에서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 욥기 38장
이 질문들의 핵심은 하나입니다.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의 섭리가 있다." 신은 욥의 고통을 인간의 작은 인과율로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거대한 우주의 질서와 섭리를 보여줌으로써, 욥의 관점을 송두리째 바꿔놓습니다.
최종 변론: 입을 가릴 뿐입니다
신의 압도적인 질문들 앞에서 욥은 마침내 깨닫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리고 세상의 원리를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그의 마지막 대답은 모든 논쟁을 끝내는 위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욥의 마지막 변론
- 무가치함의 인정: "저는 정말, 무가치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단지 입을 가릴 뿐입니다." (욥기 40장 4절)
- 앎의 한계 인정: "주님에 대하여 귀로만 듣다가, 이제는 눈으로 직접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속에서 회개합니다." (욥기 42장 5-6절)
욥은 고난의 이유를 '이해'했기 때문에 평온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거대한 섭리가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에 비로소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왜?'라는 질문을 멈추고, 그저 그 섭리 앞에 자신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의 굴레를 끊어내는 길이기도 합니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 앞에서 모든 것을 바꿀 수 없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꿀 수 있는 내면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Frankl, 1946).
결론: 이유를 묻지 않을 때 찾아오는 자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이유 없는 고난'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욥의 친구들처럼 자신의 좁은 이해의 틀 안에 세상을 가두려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욥의 지혜는 우리에게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상황을 넘어서는 더 큰 뜻이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작은 머리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이해하려는 교만을 내려놓고, 그저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어떤 폭풍우 속에서도 내 삶의 중심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고통의 이유를 묻는 것을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그 고통을 딛고 일어설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