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이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닌 비극의 현주소입니다
혹시 이런 숫자,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대한민국 국민 10명 중 8명(80%)이 ‘남녀 갈등이 심각하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미국(53%), 중국(63%)은 물론이고, 우리와 비슷한 문화를 가졌다고 여겨지는 일본(33%)과 비교해도 세계에서 가장 압도적인 수치입니다(Pew Research Center, 2023).
BBC와 같은 해외 언론들은 이 현상을 'South Korean gender war'라 부르며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에는 순수한 궁금증이 담겨있죠. “도대체 왜, 유독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서로를 이토록 미워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 현상을 단순한 ‘혐오’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서는 안 됩니다. 그 이면에는 우리 세대만이 겪고 있는 아주 특별하고도 고통스러운 구조적 모순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등’을 배웠지만, ‘차별’을 마주한 세대
이야기는 약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금의 2030 세대는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다’는 가치를 교과서를 통해 배운 세대입니다. 우리는 같은 교실에서 경쟁했고, 여성의 사회 진출과 능력 발휘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자랐습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아주 낡고 이상한 생각일 뿐이었죠.
하지만 이상을 품고 사회에 나온 우리에게 현실은 전혀 다른 ‘청구서’를 내밀었습니다.
남성들은 ‘국방의 의무’라는 이름 아래,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 약 2년간의 경력 단절과 희생을 강요받았습니다. 반면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의 문턱에서 ‘경력 단절’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과 마주해야 했고, 일상 속 ‘범죄 불안’이라는 공포를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분명 ‘평등’을 배웠는데, 왜 현실의 책임과 고통은 이토록 ‘불공평’하게 주어지는 걸까요? 이 거대한 모순 앞에서 2030 남녀는 각자 다른 이유로 분노하고 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남녀갈등 원인의 가장 깊은 뿌리입니다.
‘맨박스(Man Box)’에 갇힌 남자들
사회학자들은 남성에게 강요되는 전통적인 역할과 기대를 ‘맨박스(Man Box)’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남자는 강해야 하고, 돈을 벌어와야 하며,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압박이죠. 2030 남성들은 평등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맨박스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 좌절하고 있습니다(JSTOR, 2022).
진짜 적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해왔습니다.
남성들은 여성이 겪는 구조적 차별과 공포를 ‘과장’이라 여겼고, 여성들은 남성이 짊어진 의무와 박탈감을 ‘기득권의 엄살’이라 치부했습니다. 이 소모적인 싸움 속에서, 우리는 정작 진짜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진짜 적은 서로가 아닙니다. 바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방치한 사회 시스템’과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재단하는 낡은 시선’입니다.
‘남자가 좀 참아라’, ‘여자는 가정을 우선해야지’와 같은 말들은 더 이상 2030 세대에게 어떤 울림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세대 간의 단절을 심화시키고, 남녀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기폭제가 될 뿐입니다. 이제는 낡은 가치관을 강요하는 대신, 각자가 짊어진 현실의 무게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공감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는 전쟁을 멈추고,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는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남녀갈등 현황은 단순한 세대 문제가 아닙니다.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기성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이, 가장 약한 고리인 2030 세대에게 집중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혐오의 언어를 거두고, 서로가 마주한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남성이 왜 분노하는지, 여성이 왜 불안해하는지, 그들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야 합니다. ‘같음’을 강요하는 대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에서 비롯되는 불공정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 함께 고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올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