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시 이런 밤을 보내본 적 없으신가요?
배는 부른데 자꾸만 배달 앱을 뒤적이고, 옷장은 가득 찼는데 쇼핑몰 장바구니를 채우고, 쉴 새 없이 새로운 영상을 넘겨보지만... 하루 끝에 남는 건 왠지 모를 공허함뿐인 그런 밤 말입니다. 이상하죠. 분명 우리 주변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데, 마음속에선 '아직 부족해'라는 목소리가 떠나질 않으니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런 감정을 느껴봤다면, 그것은 당신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뇌에 깊이 각인된 원시적인 생존 본능, '가짜 결핍'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뇌는 여전히 사바나에 살고 있습니다
하루를 끝내고 침대에 누워 "오늘 참 의미 있었어"라고 말해본 적이 언제였나요? 우리는 하루 종일 많은 것을 보고, 사고, 먹고, 경험하지만 어쩐지 공허하고 부족한 느낌에 시달립니다. 배가 불러도 음식을 멈추지 못하고, 옷장이 넘쳐나도 쇼핑을 계속하며, 수십 번씩 SNS를 새로고침합니다.
이 모든 현상의 중심에는 바로 '가짜 결핍'이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뇌는 수만 년 전 식량을 찾아 헤매던 결핍의 시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거대한 불일치가 바로 우리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볼 때, 주변과 자신을 비교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구는 생존에 필수적인 본능이었습니다(Hill & Buss, 2008). 무리에서 뒤처지지 않고, 더 나은 자원을 확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 본능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합니다.
과잉의 시대가 만든 3가지 함정
우리의 '결핍 뇌'는 현대 사회의 풍요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 더, 더!'를 외치게 만듭니다. 특히 세 가지 영역에서 이 문제는 두드러집니다.
1. 끝나지 않는 먹방: 생존의 본능이 폭주할 때
과거 인류에게 '배부름'은 생존과 직결된 최고의 보상이었습니다. 고칼로리 음식은 구하기 어려웠기에, 눈앞에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먹어두는 것이 유전자에 각인된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우리는 손가락 하나로 언제든 고칼로리 음식을 주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이 풍요를 '일시적인 행운'으로 착각하고, "지금 먹어두지 않으면 언제 또 먹을지 몰라!"라는 원시적 경보를 계속 울리는 것입니다.
2. 넘쳐나는 옷장: 사회적 생존의 착각
새로운 물건, 특히 옷이나 가방 같은 사회적 상징을 구매하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더 나은 옷이나 장신구는 무리 내에서 나의 지위를 높이고 더 나은 짝을 만날 기회를 늘리는 중요한 생존 신호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SNS를 통해 나와 비교할 수 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매일같이 마주합니다(Pew Research Center, 2015). 뇌는 이 모든 것을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경쟁자'로 인식하고, 끊임없는 소비를 통해 사회적 지위를 증명하라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3.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이라는 쳇바퀴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새로운 자극에 너무나 빨리 익숙해진다는 점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쾌락 적응' 또는 '쾌락의 쳇바퀴'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스마트폰을 샀을 때의 기쁨, 원하던 옷을 입었을 때의 만족감은 안타깝게도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복 기준점은 금세 그 수준으로 올라가 버리고, 더 큰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더 새롭고 강한 자극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Diener et al., 2006). 결국 우리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쳇바퀴 위를 달리고 있는 셈입니다.
결핍의 쳇바퀴에서 내려오는 첫걸음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공허한 질주를 멈출 수 없을까요? 다행히 방법은 있습니다. 가장 첫 번째 단계는 이 모든 감정이 나의 의지박약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진 뇌의 자연스러운 반응, 즉 '가짜 결핍' 때문임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느끼는 부족함이 '진짜' 생존의 위협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원시적인 뇌가 현대 사회에 보내는 '오류 신호'인지를 구분하려는 노력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배달 앱을 열기 전, "나는 정말 배가 고픈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작은 습관이, 바로 이 거대한 쳇바퀴에서 내려오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끝없는 공허함에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통제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괴롭히던 그 감정의 정체는 바로, 풍요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의 뇌가 보내는 외로운 신호, '가짜 결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