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숫자 vs 대중의 마음: 누가 우리의 안전을 결정해야 하는가?

우리의 안전을 결정하는 것은 차가운 통계여야 할까요, 아니면 뜨거운 공포여야 할까요? '위험'의 본질을 두고 벌이는 두 거장, 폴 슬로빅과 캐스 선스타인의 위대한 지적 논쟁을 통해, 전문가의 이성과 대중의 감정이 충돌하는 민주주의의 딜레마를 파헤칩니다.

당신은 누구를 믿겠습니까? 전문가의 통계인가, 이웃의 절규인가.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두고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고 상상해 봅시다. 한쪽에서는 저명한 과학자들이 나와 사고 확률이 수백만 분의 일에 불과하며, 기후 변화를 막을 가장 효율적인 에너지원이라는 데이터를 제시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나와 후쿠시마의 끔찍한 이미지를 보여주며, 단 한 번의 사고가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다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도박에 걸 수 없다고 절규합니다.

당신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차갑지만 객관적으로 보이는 '숫자'인가요, 아니면 비합리적일지 몰라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공포'인가요?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정책에 대한 찬반을 넘어, 현대 민주주의 사회가 마주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입니다. 바로 '위험(Risk)'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을 통제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위대한 지적 전쟁의 최전선에, 행동경제학의 두 거장, 폴 슬로빅(Paul Slovic)캐스 선스타인(Cass Sunstein)이 서 있습니다.

제1막: 대중의 지혜를 옹호하다 - 폴 슬로빅의 주장

심리학자 폴 슬로빅은 전문가의 숫자만으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시도에 반기를 듭니다. 그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종종 위험을 '사망자 수'나 '경제적 손실'과 같은 단일한 척도로 측정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다층적인 개념으로 위험을 이해합니다.

다양한 시민들이 '우리의 위험'이라는 제목의 다채로운 벽화를 그리고 있다. 한쪽 구석의 전문가는 '사망자 수'라고만 적힌 단순한 흑백 차트를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대중에게 위험이란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맥락과 가치, 감정이 얽힌 하나의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죽음에도 '질'이 있다: 숫자가 담지 못하는 것들

슬로빅은 대중이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을 구분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선택한 스키를 타다 당한 사고와, 아무런 예고 없이 덮친 테러로 인한 죽음은 통계상으로는 똑같은 '사망 1'이지만,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부당함의 무게는 전혀 다릅니다. 전문가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숫자로 환원하지만, 대중은 그 죽음에 담긴 이야기와 맥락, 가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전문가와 대중의 의견이 충돌할 때,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억눌러서는 안 되며, 서로의 통찰력과 지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위험'은 우리의 마음과 문화와 독립적으로 '저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삶의 위험과 불확실성을 이해하고 대처하기 위해 발명한 개념이죠. '실제 위험'이나 '객관적 위험' 같은 것은 없습니다. 위험을 정의하는 것, 그것은 곧 권력의 행사입니다."

슬로빅에게 위험 정책이란, 가장 '올바른' 답을 찾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관을 조율하는 민주주의의 문제입니다.

제2막: 이성의 방벽을 세우다 - 캐스 선스타인의 반론

법학자 캐스 선스타인은 슬로빅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전문가의 이성적 판단이야말로, '가용성 폭포'와 같은 대중의 비합리적인 공포가 만들어내는 '포퓰리즘적'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최후의 방벽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전문가가 이성적인 통제실 안에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있다. 창밖에는 '가용성 폭포'를 상징하는 대중의 공포라는 폭풍우가 몰아치지만, 그는 그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선스타인은 전문가의 역할이, 비합리적인 공포의 폭풍으로부터 사회의 우선순위를 지키는 이성의 등대와 같다고 주장합니다.

감정은 나쁜 정책을 만든다: 비용과 편익의 원칙

선스타인은 미국의 규제 시스템이 객관적 분석보다는, '러브 캐널'이나 '앨라 스케어' 사건처럼 언론에 의해 증폭된 대중의 압력에 휘둘려 잘못된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위험 규제와 정부 개입이 '구해진 생명의 수''경제적 비용'이라는 객관적인 단위를 기준으로 한, 합리적인 비용-편익 분석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에게 잘못된 규제는 단순히 돈을 낭비하는 것을 넘어, 다른 곳에 쓰였다면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자원을 낭비하는 '비극'입니다. 그는 과학과 전문성, 신중한 숙의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객관성'을 굳게 신뢰하며, 위험을 주관적인 개념으로 보는 슬로빅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최종막: 지저분한 민주주의, 그리고 나아갈 길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편에 서야 할까요? 감정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자인가, 이성을 수호하는 합리주의자인가. 어쩌면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선스타인의 우려처럼, 비합리적인 공포와 가용성 폭포가 공공 정책의 우선순위를 왜곡하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슬로빅의 통찰처럼, 합리적이든 아니든 대중이 느끼는 '공포'는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현실이며, 정책 입안자들은 실제 위험뿐만 아니라 그 공포로부터도 대중을 보호할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전문가들이 대중의 감정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결정을 내린다면, 그 정책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지저분합니다. 시민들의 믿음과 태도를 이끄는 심리적 휴리스틱들이 편향되어 있기 때문이죠.

정답은 '선택'이 아닌 '통합'에 있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전문가와 대중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전문가의 지식을 대중의 감정 및 직관과 결합하는 더 나은 위험 정책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다만 차가운 숫자와 뜨거운 마음이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서로의 지혜를 존중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운 민주주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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