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내 눈으로 봤는데, 왜 나만 못 봤을까?
친구들과 함께 본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 중요한 회의에서 오고 간 핵심 내용, 길을 걷다 스쳐 지나간 특별한 사건. "너 아까 그거 못 봤어?"라는 친구의 말에 당황하며 기억을 되짚어보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민망했던 경험, 없으신가요?
우리는 흔히 우리의 눈과 뇌가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기록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뇌가, 때로는 눈앞의 거대한 고릴라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허술한 존재라면 어떨까요? 여기, 우리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충격적인 심리학 실험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을 뒤흔든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가 설계한 이 실험은 아주 간단합니다. 참가자들에게 흰 셔츠를 입은 팀과 검은 셔츠를 입은 팀이 농구공을 주고받는 짧은 영상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한 가지 어려운 임무를 부여하죠.
"흰색 팀이 패스한 공의 횟수만 정확하게 세어주세요. 검은색 팀은 무시하세요."
이 과제는 생각보다 어려워서, 참가자들은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영상이 중간쯤 지났을 때,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고릴라 옷을 입은 사람이 코트 안으로 걸어 들어와, 가슴을 두드리고는 9초 동안 화면을 어슬렁거리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영상을 본 수천 명의 사람들 중, 약 절반은 고릴라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의 놀라운 결과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고릴라를 놓친 사람들은 실험이 끝난 후에도 "영상에 고릴라는 없었다"고 확신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큰 사건을 자신이 놓쳤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고릴라를 놓친 이유: '주의력 예산'의 한계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비밀은 바로 우리의 '주의력'에 있습니다. 우리의 뇌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습니다. 대니얼 카너먼은 이를 '주의력 예산(a limited budget of atten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한정된 예산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활동에 배분합니다. '흰색 팀의 패스 횟수를 세라'는 어려운 과제를 받은 참가자들은 자신의 모든 주의력 예산을 그곳에 쏟아부었습니다. 특히 '검은색 팀을 무시하라'는 지시는 예산의 낭비를 막기 위한 강력한 통제 장치로 작용했죠.
그 결과, 우리 뇌는 예산을 아끼기 위해 과제와 관련 없는 '고릴라'라는 거대한 시각 정보를 아예 처리하지 않고 무시해버린 것입니다. 보는 것(Seeing)과 인지하는 것(Orienting)은 자동적인 기능이지만, 그것이 작동하려면 최소한의 주의력이라도 할당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상 속 '보이지 않는 고릴라'를 찾아보세요
이 실험은 단순히 신기한 심리학적 현상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 우리는 명백한 것에도 눈이 멀 수 있다.
-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운전 중 동승자와의 대화에 집중하다가 중요한 표지판을 놓치거나, 스마트폰을 보며 걷다가 앞사람과 부딪히는 경험은 모두 우리 일상 속의 '보이지 않는 고릴라'입니다. 좁은 길에서 트럭을 추월하는 운전자 옆에서 동승자들이 말을 멈추는 것은, 운전자의 주의력 예산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에 깊이 집중하는 능력은 위대한 성취를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집중으로 인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끊임없이 경계해야 합니다. 때로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며 내가 놓치고 있는 '고릴라'는 없는지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 당신의 하루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고릴라'가 있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