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무너뜨리는 진짜 적은 무엇인가요?
우리 안에는 스스로를 파괴로 이끄는 두 마리의 강력한 맹수가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듯한 맹렬한 불길, '분노'입니다.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한 달콤한 늪, '욕망'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 두 가지 감정 때문에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후회하곤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홧김에 소리를 지르며 저지른 잘못과, 달콤한 쾌락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저지른 잘못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쁜 것일까요? 2000년 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의 통찰을 빌려 이 심오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의 상식과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분노는 '피해자'의 비명, 욕망은 '가해자'의 속삭임
테오프라스토스는 죄를 저지르게 된 '동기'에 주목합니다. 그는 분노로 인한 잘못과 욕망으로 인한 잘못이 근본적으로 다른 뿌리에서 나온다고 분석했습니다.
"욕망에서 비롯된 죄가 분노에서 비롯된 죄보다 더 나쁘다. 이것은 훌륭한 철학이다."
왜 그럴까요? 그는 두 감정에 휩싸인 사람의 내면을 이렇게 해부합니다.
분노에 휩싸인 사람: 상처 입은 짐승
분노하는 사람은 외부의 어떤 자극(모욕, 부당함 등)에 의해 촉발된 '고통'과 '내적인 경련' 때문에 이성을 잃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행동은 어떤 의미에서 외부의 공격에 대한 '반응'이며, 그는 그 상황의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잘못은 갑작스럽고, 폭발적이며, 종종 이성과의 단절 속에서 일어납니다.
욕망에 휩싸인 사람: 스스로 노예가 된 주인
반면, 욕망에 이끌리는 사람은 쾌락에 의해 '지배'당합니다. 그는 외부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즐거움을 좇아 '스스로' 잘못된 행동으로 뛰어듭니다. 그의 행동은 계획적이고, 은밀하며, 이성이 멀쩡히 작동하는 와중에도 쾌락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이런 모습이 "더 자기방종적이고, 덜 남자답다"고 표현했습니다.
왜 '욕망'이 더 위험한가
이 분석을 통해 우리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쾌락(욕망)에서 비롯된 죄가 고통(분노)에서 비롯된 죄보다 더 가혹한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이유는, 그 행동의 '주체성'에 있습니다.
- 분노는 수동적입니다. 외부 자극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결과에 가깝습니다.
- 욕망은 능동적입니다. 스스로 쾌락의 노예가 되기를 선택한 결과입니다.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 사람은, 나중에 "내가 왜 그랬을까"라며 후회하고 자신의 행동을 낯설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성이 잠시 마비되었던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달콤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계획적으로 누군가를 속인 사람은, 그 행동을 하는 동안 온전히 자신의 이성으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쾌락에 팔아넘긴 것이죠.
이것이 바로 스토아 철학자들이 욕망을 분노보다 더 교활하고 위험한 적으로 간주했던 이유입니다. 분노는 눈에 보이는 불길과 같아서 경계하기 쉽지만, 욕망은 따뜻하고 달콤한 늪과 같아서, 우리를 서서히, 그리고 기꺼이 잠식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주된 적은 무엇입니까?
이 고대의 통찰은 우리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합니다. 당신은 주로 어떤 감정 때문에 후회할 일을 만드나요? 외부의 자극에 쉽게 폭발하는 '분노'인가요, 아니면 내면의 달콤한 속삭임을 이기지 못하는 '욕망'인가요?
나를 무너뜨리는 주된 적이 누구인지 아는 것. 그것이 바로 감정을 다스리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일 것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우리에게 그 적의 얼굴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