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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이 당신의 '변호사'처럼 행동해야 하는 이유
우리는 매일 구글에서 검색하고,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며,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립니다. 이 모든 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하는 대가로, 우리는 우리의 가장 사적인 정보, 즉 데이터를 기꺼이 제공합니다. 기업들은 이 데이터를 '자산'으로 여기고, 맞춤형 광고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창출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당신의 데이터를 이용하여 당신에게 더 비싼 가격을 제시하거나, 당신의 정치적 성향을 조작하거나, 당신의 정신 건강에 해로운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노출시킨다면 어떨까요? 현재의 개인정보보호법은 '동의'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거대한 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데이터를 우리 자신을 공격하는 무기로 되돌려받는 '감시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깨어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하버드 법대의 잭 볼킨(Jack M. Balkin) 교수는 시대를 바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합니다. 바로 '정보 신탁(Information Fiduciary)'이라는 개념입니다.
1막: '신탁 의무'란 무엇인가?
'신탁(Fiduciary)'이라는 말은 조금 생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일상에서 신탁 관계에 놓인 전문가들에게 우리의 삶을 맡기고 있습니다.
- 의사: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환자에게 해가 되는 치료를 하지 않을 의무가 있습니다.
- 변호사: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며, 의뢰인의 비밀을 절대적으로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 자산관리사: 고객의 돈을 자신의 돈처럼 소중히 여기고, 고객의 이익을 극대화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처럼 '수탁자(Fiduciary)'는 자신의 전문 지식과 권한을 오직 상대방(위탁자)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하는, 매우 높은 수준의 도덕적, 법적 의무를 집니다. 그들은 결코 위탁자의 정보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거나 위탁자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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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플랫폼 기업이 당신의 '수탁자'가 되어야 합니다
잭 볼킨 교수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구글, 메타, 네이버와 같은 거대 플랫폼 기업들 역시, 우리의 민감한 데이터를 대규모로 수집하고 처리하는 만큼,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정보 수탁자'로서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Balkin, J. M., 2016). 그들은 더 이상 우리의 데이터를 자신들의 '자산'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오직 우리의 이익을 위해 관리해야 할 '신탁 재산'으로 여겨야 합니다.
2막: '정보 신탁'이 가져올 세상의 변화
만약 플랫폼 기업들에게 '정보 신탁' 의무가 부과된다면, 우리의 디지털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요? 이것은 단순히 개인정보 유출을 막는 소극적인 보호를 넘어,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기업의 의무: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 조작과 중독의 종말: 기업은 더 이상 사용자의 심리적 약점을 파고들어 스크롤을 멈추지 못하게 하거나, 특정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다크 넛지(dark nudge)' 알고리즘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 데이터 착취의 종말: 당신의 건강 정보나 금융 정보를 이용하여 당신에게 불리한 보험 상품이나 대출 상품을 추천하는 행위가 금지됩니다.
- 투명성의 시작: 기업은 당신의 데이터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알고리즘이 왜 그런 추천을 했는지 명확하게 설명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됩니다.
이것은 기업이 사용자의 데이터를 활용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을 막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수익 창출 과정이 결코 사용자의 이익에 반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윤리적 기준을 세우자는 것입니다(A Study on the Possibility of Introducing the Information Fiduciary Model into Domestic Law,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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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권리를 넘어 '신뢰'를 요구할 때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정보 열람권', '삭제권' 등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는 방식으로 데이터 주권을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어떤 정보가 어떻게 쓰이는지 감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개인의 권리를 넘어, 기업에게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의무'를 요구해야 합니다. "내 정보를 유출하지 마세요"를 넘어, "내 정보를 가지고 나에게 해로운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해주세요"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정보 신탁'은 아직 법제화된 개념은 아니지만, 플랫폼과 사용자 간의 깨어진 신뢰를 회복하고, 데이터 윤리의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현실적인 대안입니다. 당신의 변호사가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당신의 데이터를 가진 플랫폼 기업도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계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