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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살에 글을 읽은 아이, 키로 치면 몇 cm일까요?
여기 조금은 황당하게 들리는 질문이 있습니다. "네 살에 유창하게 글을 읽었던 줄리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만약 줄리의 조숙함만큼 키가 큰 남자가 있다면, 그의 키는 몇 cm일까요?"
잠시 생각해보세요. 180cm? 너무 평범하죠. 210cm? 그건 좀 과한 것 같습니다. 아마 당신의 머릿속에는 '꽤 크지만, 세계 기록 수준은 아닌' 200cm 언저리의 키가 떠올랐을 겁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값을 떠올립니다.
방금 당신의 뇌 안에서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능'이라는 추상적인 척도를 '키'라는 물리적인 척도로 아무런 저항 없이 변환해낸 것이죠.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우리 뇌의 직관 시스템(시스템 1)이 가진 이 놀라운 능력을 '강도 매칭(Intensity Matching)'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세상을 자로 재는 대신, 마음속에 있는 단 하나의 '강도 저울'로 모든 것을 비교하고 판단합니다.
마음속 '마스터 저울'의 작동 원리
강도 매칭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의 시스템 1은 세상의 모든 것에 잠재적인 '강도 척도'가 존재한다고 가정합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영역의 사건들을 이 공통의 척도 위에서 비교합니다.
만약 범죄가 색깔이라면, 절도는 옅은 빨간색이고 살인은 아주 진한 심홍색일 겁니다. 만약 범죄가 음악이라면, 대량 학살은 포르티시모(fortissimo)로 연주되겠죠.
이처럼 우리는 범죄의 '심각성', 소리의 '크기', 줄리의 '조숙함'을 모두 '놀라움'이나 '강렬함'이라는 단 하나의 추상적인 척도 위에서 비교할 수 있습니다. 4살의 독서가 주는 놀라움의 강도를, 키가 주는 놀라움의 강도와 일치시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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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능력은 우리가 세상을 빠르고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이 '느낌에 의존한 비교'는 현실 세계에서 우리의 판단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주범이 되기도 합니다.
당신을 조종하는 강도 매칭의 함정들
우리의 이 직관적인 '차원 간 가치 변환' 능력은 마케팅, 법률, 일상생활 등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의 선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사례 1: 마케팅 - 당신은 가격이 아니라 '가치'를 비교한다
명품 매장에 왜 상상 초월의 가격을 가진 'VVIP 한정판' 가방이 진열되어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 수조차 없는 그 제품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당신의 '강도 저울'을 조작하기 위해서입니다. 5,000만 원짜리 가방을 보고 난 뒤에는, 500만 원짜리 가방이 '비교적 합리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가격의 절대값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터무니없는 사치'라는 강도와 '꽤 괜찮은 사치'라는 강도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례 2: 법률 - '정의로운' 형량의 착각
배심원들은 종종 범죄의 '잔혹함'이라는 강도와 형벌의 '엄격함'이라는 강도를 일치시키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는 정의감의 발로처럼 보이지만, 사건의 복잡한 정상참작 사유나 법리적 해석(시스템 2의 영역)을 무시하고 오직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시적인 강도 매칭에 의존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그 결과, 여론에 휩쓸린 비합리적인 판결이 나올 수 있습니다.
사례 3: 일상 - 예측의 오류
우리는 "4살에 글을 읽은 줄리는 대학에서 학점이 얼마나 좋을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린 시절의 비범함'이라는 강도와 '대학 시절의 우수함'이라는 강도를 매칭하여 "아주 높을 것이다"라고 예측합니다. 하지만 이는 통계적으로 틀린 예측입니다. 어린 시절의 재능이 미래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죠(이를 '평균으로의 회귀'라고 합니다). 이처럼 강도 매칭에 기반한 예측은 그럴듯하게 느껴지지만, 실제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습니다(Kahneman, 2002).
마음의 저울을 의심하라
강도 매칭은 복잡한 세상을 빠르게 판단하도록 돕는 시스템 1의 경이로운 지름길입니다. 하지만 이 지름길은 종종 우리를 진실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함정이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이 내면의 '자동 번역기'를 멈추고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핵심 내용 요약
- 강도 매칭이란?: 우리의 직관(시스템 1)은 지능, 키, 돈, 심각성 등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들을 '강도'라는 단일 척도로 변환하여 비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일상 속의 함정: 이 능력은 마케팅(가격 비교), 법률(형량 결정), 일상(미래 예측) 등에서 우리의 판단을 왜곡하고 통계적 오류를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 극복의 열쇠: 어떤 판단이 '그럴듯하게 느껴진다'는 이유만으로 옳다고 믿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느낌이 아닌, 객관적인 데이터와 논리를 찾아 비교하는 시스템 2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지금 '비싸다', '정의롭다', '당연하다'라고 느끼는 그 판단은, 과연 현실에 기반한 것일까요, 아니면 당신의 마음속 저울이 만들어낸 그럴듯한 환상은 아닐까요? 그 저울의 눈금을 의심하는 순간, 당신은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